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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21:2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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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최삼경의 친족 정윤석이 행위구원이라는 이단사설과 행위심판이라는 정통교리의 차이도 몰라 행위심판을 강조한 제 책을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엉터리 기사를 썼지요. 그게 우리 교회 이단시비의 출발이었습니다.
오늘 한기총 임원회 후 기자들과 열린 끝장 토론에서도 한 기자가 질문을 해 제가 행위구원과 행위심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렸는데. 항상 불의하게 이단사냥꾼 편에 서는 CBS노컷뉴스의 박성석 기자가 무지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고 엉뚱한 질문을 하더니 결국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무지에 기초해서 엉터리 기사를 썼네요.
CBS노컷뉴스 박성석 기자의 심각한 무지가 드러나는 기사
"한기총은 임원회에 이어 기자회견을 열어 변승우 목사를 놓고 끝장 토론회를 열었으나,
변 목사는 주요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받게 된 구원관이나 신사도운동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하지 못했다는 참석자들의 평갑니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구원관이 아닌 ‘행위의 심판’을 고수하는데다..."(http://news.zum.com/articles/51104383?c=07&t=t)
"이단으로 규정된 신사도운동"이라? 대놓고 신사도운동을 하는 WLI나 HIM은 이단이 아니라면서 무려 10권의 책에서 신사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것을 "팩트체크"라는 책자를 보여주며 증명했는데, 충분한 해명을 못했다니 이게 말입니까? 글입니까?
또 제가 행위 심판을 고수한다고 지적했는데, 그건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찰스 하지, 존 스토트, 로이드 존즈, 김세윤, 이한수, 길성남, 권연경, 홍인규... 에구 힘들어서 다 말 못하겠네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고수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답답하네요... 제발 공부 좀 하라고 저의 책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에 나오는 행위 심판에 대한 부분을 올려드립니다.
CBS는 기자 수준 좀 높여주시길... 목사가 아니라서 모르는 것은 이해해도 적어도 설명을 하면 말귀는 알아듣는 자를 기자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요?
(1) 행위 구원과 행위 심판!
복음은 무엇입니까? 바로 칭의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칭의의 교리로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2장 6-1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권연경 교수님은 “바울의 구원론 및 칭의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이 구절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칭의의 교리는 로마서 1-3장에 기술된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것과 더불어 이 구절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복음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칭의를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게 만드는 첫 단추와도 같은 말씀입니다.이 구절에서 바울은 매우 근본적인 신학적 원리를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 심판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최후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심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깔끔한 교차 대구적 구조를 통해 선명하게 진술했습니다.
A.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위를 따라 갚으심(6절)
B. 선을 행하는 이에게 영생으로 갚으심(7절)
C. 악을 행하는 이에게 진노로 갚으심(8절)
C'. 악을 행하는 이에게는 파멸
― 첫째는 유대인, 그리고 헬라인도(9절)
B'. 선을 행하는 이에게는 영광
― 첫째는 유대인, 그리고 헬라인도(10절)
A'.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심(11절)
여기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수사적으로 이러한 교차 대구적 구조에서는 중심에 놓인 사항이 힘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악행에 관한 C와 C'가 그 중심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런 구조를 통해 율법을 어기면서도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대인을 맹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불신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7절에 나오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참 유대인 즉 이면적인 유대인입니다. 나아가서 29절의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는 표현은 새 언약과 관련이 있는 표현이므로 기독교인들을 함축적으로 지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 또한 참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한수 교수님은 7절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 10절을 주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라는 표현이 1:16에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고 또한 2:10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함축적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만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사람들에게 폭넓게 적용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일반적인 표현을 쓰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8절의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는 표면적인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노와 분노로 갚으십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죄와 멸망입니다. 이 구절들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 것입니다. 행위 심판은 구약과 사복음서,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들에 수없이 언급되어 있는 성경적인 명백한 진리입니다. 이한수 교수님은 “행위 심판 사상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바울은… 행위 심판의 원리를 비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한다.”라고 썼습니다.이 말을 하자니 신학생 때 성경에 나오는 행위 심판에 관한 구절들을 모두 뽑아서 그것을 만나는 신학생들과 신자들에게 읽어주고 충격을 받은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사용했던 구절들 중의 일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에스겔 18:26-27, 30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에스겔 33:12, 18-20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가복음 9:43-47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요한일서 3:7-10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계시록 21:6-8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렇듯 성경에는 행위 심판에 대한 구절들이 가득합니다. ‘행위 구원’과 ‘행위 심판’은 다른 것입니다.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고 이단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 심판’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고 바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믿는 자가 아니라 참 믿음을 가진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성경대로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과 글에 행위 심판 사상이 나타납니다(그리고 우리 교회도 행위 심판을 강조합니다). 그중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먼저,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 날에 이르러 우리는… 무엇을 행하였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마 25장). 그리고…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적으로 살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또,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한 실천이 신앙고백자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여러 표증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에 섰을 때 거룩한 실천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하나님이 심판석에서 선고를 내리기 위해 채용하는 증거들이 사람들이 세상에서 행한 행위들임을 성경이 매우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사람들의 실천을 재판의 유일한 증거로 채용하실 것’이라고 썼습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대담하게 이렇게 썼습니다.
“심판대에서 주어질 오직 한 가지 질문은 ‘죄에 대해서 어떠하냐? 너의 삶이 어떠하냐? 네가 무엇을 행하였느냐?’일 것입니다. 심판은 죄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주어질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체였든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였으면… 죄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 심판에 대한 설명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우리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라 불리는 존 스토트의 글입니다. 그만큼 설명이 탁월합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해 심판받음
신약성경 전체는 이것을 가르친다. 곧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지만’ 행위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순된 말이 아니다. 사랑의 선한 행위만이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공개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감추어진 것이다. 그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선행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약 2:18, 20)이다. 심판 날은 공개적인 날이 될 것이므로 공개적인 증거, 즉 동정심을 보이는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의 결과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도 여러 번에 걸쳐 이것을 가르치셨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심판이다.”
같은 책에서 그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선행
우리는 행위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지만, 행위 없이 구원받을 수도 없다. 선행은 구원의 길은 아니지만 구원을 나타내는 적절하고도 필요한 증거이다.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어이없게도 이렇게 명백하고 중요한 진리를 모르는 신학자와 설교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울산에서 목회할 때 로마서 강해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읽은 자료들 중에 많은 주석가와 학자들이 로마서의 이 구절 때문에 당혹스러워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당혹스러워할까요? 좋게 말하면 루터식, 적나라하게 말하면 구원파식의 왜곡된 칭의론에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이 구절을 읽으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죄 사함받고 천국 갈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니 이게 뭐야?’ 하고 말입니다. 백석대 홍인규 교수님도 『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저와 동일한 지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2:6). 이것은 마지막 심판이 행위에 근거할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의 서신을 비롯한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두루 발견 된다(예. 롬 14:12, 고전 3:8, 13 이하, 4:4 이하, 9:17, 고후 5:10, 9:6, 갈 6:7-10, 엡 6:8, 골 3:23, 24, 마 5:20, 22, 27-30, 7:21, 16:27, 25:31-46, 눅 18:18-30, 요 5:29, 히 6:7-8, 10:26-31, 벧후 1:10-11, 계 2:7, 11, 23, 26, 3:5, 12, 21, 14:10-12, 20:12-13, 22:12). 행위 심판의 교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행위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업적을 인정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삶이었는지 여부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믿든 자유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십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보응하십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심판은 오직 ‘진리대로’ 이루어집니다(롬 2:2). 그러므로 진리를 바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고후 5:11).여기서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칭의가 무엇입니까? 칭의는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에 대한 대응책이요 해결책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장래의 노하심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쓴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여기서 ‘노하심’과 ‘구원’이 대조가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노하심에서 구원받는 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님은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칭의의 언어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무죄 선언을 받는다는 것이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의인 선언을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의미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아주 실제적인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화가 나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부인이 화가 나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그리고 직장에서 상사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무섭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화가 나시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순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이 온유한 분이기 때문에 더 무섭습니다(롬 2:4-5).사람의 분노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왕의 분노입니다.
잠언 16:14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잠언 20:2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왕에게는 생사여탈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의 진노보다 7배나 더 무서운 것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요한계시록 6:15-16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이처럼 왕들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깨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왜 그렇게 무섭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요한계시록 14: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런데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석에서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주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래서 칭의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 2장 6-11절에 무엇이 나옵니까? 바로 심판석에서의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와 분노입니다.
로마서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그 전절에도 진노의 날인 심판 날에 임할 진노가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므로 로마서 2장 6-11절은 칭의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이 구절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칭의는 반드시 이 틀 안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왜 능력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구원파적인 칭의의 교리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위 심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것처럼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능력만이 죄의 속박과 지배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은 참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능력인 참 복음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의 일부인 행위 심판!
앞에서 저는 로마서 2장 6-11절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 즉 행위 심판이 3장 후반부터(21-31절) 시작되는 칭의에 대한 설명의 기틀이 된다는 것을 설명해드렸습니다. 이것을 확증해주는 더 결정적인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 심판이 칭의의 기틀이 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복음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제 말을 듣고 어떤 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것입니다. 행위 심판이 복음의 일부라고요? 예! 그것은 복음의 일부입니다.
로마서 2: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권연경 교수님은 이 구절에 대해 『로마서 산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놀랍게도 바울이 유대인의 공허한 선민의식을 부순 무기는 소위 믿음과 은총의 논리가 아니라 행위 심판이라는 구약적 신념이었다. 바울은 이 행위 심판사상이 ‘내 복음에 의한’ 것, 곧 자신이 선포한 복음에 속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2:16).”
홍인규 교수님도 『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을 주목하여야 한다. ‘나의 복음’이란 선포를 위하여 바울에게 맡겨진 복음을 말한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참조 3:8),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 값싼 은혜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의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실 것인데, 그것도 율법의 의로운 요구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복음’ 하면 ‘예수를 믿어서 심판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가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이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이 말하는 ‘심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의 은밀한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전도서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이처럼 은밀한 죄를 해결하지 않은 자는 신·불신을 막론하고 지옥에 던지는 심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에 나타나 있는 심판입니다. 바울의 복음에 나타나 있는 심판은 ‘행위 심판’입니다. 확인하는 의미에서 함께 6절부터 16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2:6-1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이번에는 괄호 안에 있는 말씀을 빼고 읽겠습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신의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일부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주의적인 논란을 종식시키고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결정적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신앙주의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합니다. 이단인 구원파적인 신앙주의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한없이 귀중한 진리입니다.행위 심판은 복음의 기틀일 뿐 아니라 복음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은 행위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행위 심판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복음을 설명하거나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행위 심판은 복음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먼저 행위 심판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 증거를 하나 보여드리지요!
사도행전 24:24-25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라면 어떤 주제를 다루든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벨릭스 부부는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 즉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바울이 전한 것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이었습니다. 마치 로마서에서 칭의의 복음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2장 6-11절에서 행위 심판에 대해서 쓴 것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먼저 행위 심판을 설명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장차 오는 심판’을 설명하기 전에 ‘의’와 ‘절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행위 심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울은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지어도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에는 마지막 심판 때 은밀한 것을 심판하는 행위 심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은밀한 죄를 숨기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 때 멸망받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이처럼 행위 심판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이 이 시대의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복음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입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곳곳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에베소서 5:5-7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
모두 바울이 한 말입니다. 바울은 행위 심판을 굳게 믿었고, 그것을 복음에 포함시켜서 전파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바울뿐 아니라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도 그렇게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 역시 하나님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로마서 2장 6-11절을 요약해놓은 것 같지요! 당연히 행위 심판에 관한 묘사입니다. 베드로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도 행위 심판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으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적어도 천국에 간다’는 것은 성경적인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입니다.약 10년 전 김세윤 교수님은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교회 안에 두루 퍼진 왜곡된 칭의론에 대해 대담하게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루터와 그에 동조한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이 ‘의인으로 칭함’의 그림을 단순히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특히 그중 일부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히 우리 대신 벌 받음(penal substitution)이라고 하는 좁은 이해에만 근거하여, 윤리를 구원론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약점을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지하지 못한 개신교도들 간에 우리가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받으니,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윤리적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오해의 극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기독교 이단도 있습니다. 그런 극단적 사례는 차치하더라도 오늘 한국의 엄청난 개신교도들의 수와 그들의 ‘믿음’의 열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윤리가 개인 윤리 면에서나 사회 윤리 면에서 아주 미약하게 나타나는 통탄해 마지않을 상황은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 특히 ‘칭의론’으로 표현되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년 뒤인 지난해(2013년) 『칭의와 성화』라는 책에서 김세윤 교수님은 수위를 높여서 더 강도 높은 지적을 했습니다.
“한국의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이미 의인으로 칭함받음에 자만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예정론과 성도의 견인론으로 뒷받침하여 구원파적 안일에 빠지기까지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구원받을 자들을 선택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그 예정에 따라 구원하신 자들은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덕 입어 이미 의인이라 칭함받았으니, 나는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나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니 나는 이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의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이 말은 대개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내포함)라고 여깁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이 복음의 진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구원파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많은 정통 목사들도 사실상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들은 좀 슬그머니 가르친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참으로 통쾌한 지적이지요! 심지어 같은 책의 뒷부분에서 김세윤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칭의 됨’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 쪽에서 보든, (우리 인간의) 믿음 쪽에서 보든,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구조적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방종을 위한 면허증으로 가르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이단자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이런 설교자들이 이단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멸망하게 할 이단”(벧후 2:1)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단자들만 영혼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통 행세하는 그들 역시 구원파적인 왜곡된 복음을 통하여 신자들의 상당수를 지옥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이용하여 모든 것이 영 단번에 잘되었다고 소리치기만 하는 것보다 영혼에 있어서 더 큰 위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이단입니까? 온갖 음해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바울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 전해온 우리입니까? 아니면 김세윤 교수님이 이단이라고 말한 구원파적인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우리더러 ‘신 율법주의’니 ‘율법주의 이단’이니 하고 매도하는 저들입니까? 말이 나온 김에 루터가 아내처럼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다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누가 진짜 이단인지 한번 가려봅시다.
갈라디아서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여기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누가 진짜로 저주받아 마땅한 이단일까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목사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의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말을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부산의 통합 교단 모 원로목사처럼 오직 믿음 외에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엉터리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잠깐만 살펴보아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런 구원파적인 거짓 복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드리겠습니다.
1)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십자가는 단순히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많은 목사들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는 부분만 인용하고 “오직 십자가”라고 떠들어대며 그렇게 말해야만 정통인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한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를 못 박아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못 박히게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단순히 죄 사함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 이렇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비단 이 구절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도 같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읽어도 이해가 안 되실 것이므로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이 설교를 끝까지 들으면 그 구절이 같은 내용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2)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증거합니다. 사람들이 “봐요. 오직 믿음이잖아요?”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는 유일한 비결로 제시한 믿음은 루터가 말한 행위와 분리된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이처럼 바울이 전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여기서 “으로써”는 ‘디아’(diav)라는 단어인데 “~을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사랑을 통해서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몇몇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반하여 강조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그럼 사랑을 통해서 믿음이 표현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은 율법의 강령 즉 골자요 핵심입니다(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면 대신계명인 1-4계명을 지킬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하면 대인계명인 5-10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순종을 낳는다는 것입니다(롬 1:5, 16:26). 그러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약 2:14-26)과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루터가 말한 수동적인 믿음(즉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절을 통해 재확인이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나중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의의 소망’은 심판 날 받는 최종적인 칭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만이 심판 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데 효력이 있고 다른 믿음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전혀 효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을 ‘수동적인 믿음’으로 착각한 루터가 왜 갈라디아서를 자기의 부인처럼 아끼고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그가 지푸라기로 여긴 야고보가 주장한 믿음과 똑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이죠! 아마 루터가 믿음에 대해서 착각한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의미도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3)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심판은 놀랍게도 행위 심판입니다.
앞에서 ‘십자가’와 ‘믿음’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칭의에 대해서 논할 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겠지요. 이제 ‘심판’에 대해 설명함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심판은 믿기만 하면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무조건 천국에 보내는 심판이 아니라, 참고 선을 행하는 자들은 영생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노와 분으로 갚아주는 ‘행위 심판’입니다. 이것은 다음 두 구절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3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둘 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구절들인데 행위 심판에 대해서 쓰고 있지요! 이 중 뒤 구절에 대해 권연경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바울의 신학적 신념을 집약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시므로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신념과 바울의 논증을 이끌어온 ‘성령/육체의 반제’(3:3, 4:29, 5:16-26)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례와 같은 무익한 조건들을 의지하며 헛된 희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런 ‘값싼 은총’에 속아 심는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착각’은 교회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 중 하나다.논증을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다시금 믿음과 은혜의 논리가 ‘행위 없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 곧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간 삶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신념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드러나는 사상으로, 하나님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신념 중 하나다. 따라서 이 원리를 무시하는 것은 그 원칙을 세우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착각한다고 해서 그 원칙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미래가 위험해질 뿐이다.”
그렇습니다. 행위 심판에 대한 무지 또는 의도적인 무시는 커다란 위험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행위 심판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앞부분에 행위 심판의 원칙을 기록해놓았습니다(로마서 2장). 갈라디아서에서는 뒷부분에 행위 심판의 원칙을 기록해놓았습니다(갈라디아서 5-6장). 루터가 가장 좋아했다는 두 서신 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터의 주장과 다른 행위 심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믿기만 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요즘 유행하는 복음이 비성경적인 것이며 바울과 무관한 다른 복음임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입니다.참고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은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결국 지옥에 간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17절에 따르면 이들은 믿는 자들입니다. 결국 신자들도 행위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진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17-20절에 의하면 구원받은 신자가 성령을 좇아 행할 수도 있고 육체를 따라 행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현저한 일들을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21절). 반면에 성령을 좇아 행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22-23절),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고 써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쓰지 않고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3절)라는 애매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것을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여기서 ‘이 같은 것’은 성령의 열매를 뜻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법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 날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바울은 그 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만 심판 날 의롭다 함을 받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그런데 정말로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요? 물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옥토 즉 30배, 60배, 100배로 열매 맺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는 인내로써 말씀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눅 8:15). 이 외에도 열매를 맺어야 버림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3:9-10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태복음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요한복음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6:21-22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6: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유다서 1:11-12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더 증거가 필요합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래서 저도 근거가 되는 구절들을 다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상 깔끔하게 증명해드린 대로, 다른 복음은 우리 교회가 아니라 우리를 이단이라고 떠드는 목사들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요 적어도 이단성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성경 그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우리에게 율법주의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개의치 말고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시고, 당당하게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참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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