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날아오던 KAL 858편이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폭파됐다.
중동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탑승객의 대부분이었으며 탑승자 115명 전원은 사망했다. 조사결과,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났으나 사건은 대통령 선거일과 겹치면서 근거 없는 소문들이 점차 떠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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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3월, 부산 벡스코에서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의 범인인 김현희 씨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씨의 장남인 이즈카 고이치로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
‘KAL기 폭파범’으로 사건의 당사자인 김현희(49) 씨는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15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였다. 그는 이 같은 ‘근거 없는 소문’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김 씨의 안위를 고려치 않고 압박했음을 알렸다.
김 씨는 “지난 노무현 정권 시절 KAL기 폭파 사건을 ‘안기부 조작 사건’으로 몰고 가려는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거주지를 노출시켰다”면서 방송 내용은 “내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공작원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가짜’라고 말하라는 것이었고, 북의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KAL기 폭파 사건을 우리나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비열한 공작의 나팔수처럼 된 방송 프로에 어떻게 나갈 수 있었겠는가”라면서 “김대중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짜’로 만들고 온갖 의혹을 부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을 뒤집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를 압박해왔다”고 지난 정권에서 겪었던 일들을 토로했다.
김 씨는 특히 자신의 ‘거주지’를 노출한 것과 관련, “정말 배신이었다! 등에 칼을 꽂는 것과 같았다. 자기들 말 안 듣는다고 나를 노출했다. 자기들이 직접 나를 손댈 수는 없고 북한에서 와서 나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고 분노의
목소리를 냈다.
이 같은 김 씨의 분노는 북한이 고(故) 황장엽 선생에게도 생전 테러를 하겠다고 암살단을 보냈었고, 김정일의 처조카인 이한영도 1997년 거주지 노출로 살해됐던 만큼 ‘거주지 노출’이 김 씨 가족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으면서 여유 있게 살아온 것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김 씨는 “좌파 정권이 만든 국정원(김대중 정부 이후)에서는 보호 받은 적이 없다”며 “오히려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도망쳐나온 내게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라며 방송을 출연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KAL기 폭파사건 재조사에 들어갔지만 조사에 응하지 않은 것과 관련, “숱한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근본을 훼손하고 다른 목적을 가진 조사에는 응할 수 없었다”라면서 “(결국) 과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 그런 결론을 내리고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사과하라는 권고 한마디 없었다”고 일침을 놨다.
‘지난 정권’이 왜 김 씨에게 이 같은 일을 강요했을지에 대한 이유로 그는 “이 사건을 뒤집으면 이전의 군부와 우파 세력이 도덕적으로 타격을 받기 때문”이라면서 “정치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본다.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 명단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들었다(2008년 10월
해제)”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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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87년 12월 KAL858기 폭파 후 체포돼서 김포공항에서 압송되는 김현희.(자료사진) ⓒ 연합뉴스 |
김 씨는 또 지난 정권을 향해 “서민과 노동자의 정부라면서 중동 근로자들의 희생을,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했다”고 비판한 뒤 당시 여론 조성에 앞장섰던 정의구현사제단을 겨냥해 “북한에서는
성경책이 발견돼도 대역죄고 가족이 멸절한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그런 정권을 옹호하고,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사건을 남한이 했다고 뒤집어씌우니, 과연 그들은 사제복을 입고서 정말 하느님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현 정권에 대해서도 “당시 희생된 근로자 중 현대
건설 직원이 60명 이상이었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을 뒤집으려는 범죄에 대해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것이 한심하지 않은가”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김 씨는 KAL기 폭파사건을 벌인 뒤 느꼈던 ‘후회’의 감정도 털어놨다. 그는 “내가 왜 이 짓을 했을까. 정말 잘못됐다는걸 느끼게 됐다”면서 “나를 이렇게 도구로 만든 김일성·김정일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근로자들도 희생됐고, 나도 그렇고 내 가족도 희생이 됐다”고 괴로웠던 심경을 털어놨다.
김 씨는 또 자신이 지난 정권과 이 같은 ‘싸움’을 벌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해 “(당시 정권이) 큰 죄인인 나를 살려놓은 것은 KAL기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라면서 “나는 혼자서라도 진실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데일리안 = 조소영 기자]